대인관계에서 중용을 지키는 것 역시 자율신경계의 균형에 중요하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어느 날 당신이 길을 가다 사회복지 공동모금회가 열린 것을 보았다.

 마침 생각지도 못한 수입이 생긴 참이라 선뜻 5만 원짜리 한 장을 모금함에 넣었다. 그렇다고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가슴에 달린 사랑의 열매 배지를 보여주며 “5만 원이나 기부했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그때의 경제사정과 기분이 허락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겠지만 두고두고 뿌듯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똑같은 행동이라도 그 대상이 가까운 사람이면 나도 모르게 다른 반응이 나온다. 내 의지로 기꺼이 누군가를 도와준 경우라도 내심 대가를 기대하게 된다. 상대가 그 대가에 상응하는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으면 ‘힘들 때 성심껏 도와주었는데 은혜도 모른다’며 괘씸해한다.

그렇게 섭섭하고 못마땅하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능력 이상의 기부를 한 셈이다. 그들에게는 1000원의 가치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당신은 지갑에 달랑 한 장밖에 남지 않은 5만 원짜리를 선뜻 내준 셈이다. 이럴 경우, 상대에게 베풀었던 선의가 ‘원망’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내 마음에 상처를 입히게 된다.

언짢은 기분은 자율신경을 뒤흔들어 결국 몸도 상하게 만든다. 이렇게 ‘매사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온 힘을 다해 애쓰는’ 사람들은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무리를 하기 쉽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내 능력이 닿는 범위에서 내가 감당할 정도로만 상대에게 베풀면 된다. 무리한 부탁은 처음부터 거절한다. “1000원 정도라면 괜찮지만 지갑에 든 5만 원을 내주면 당장 생활에 곤란을 겪게 된다”며 사정을 설명하고 상대에게 이해를 구한다.

인간은 자신의 단점에는 쉽게 브레이크를 걸지만 장점에는 곧잘 엑셀을 밟는다. 좋은 게 좋다며 한계를 넘어서고 나면 그 뒷감당은 상대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한다. 이런 태도가 ‘선(善)’인 줄 알고 계속 엑셀을 밟게 되면 머지않아 그것이 허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다치고 나면 그 영향이 몸에 나타난다.

우리는 흔히 가까운 사람들은 내 마음을 다 알아줄 것으로 착각한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평가해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와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다음 예를 보자.

중증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세미나에 76세의 환자 한 분이 참가했다. 중용 식단을 배우려고 부인도 함께 오셨다. 그는 이제까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고 한다. 그러다 덜컥 암에 걸리고 말았다. 그토록 고생하다 병이 생겼으니 부인이 헌신적으로 간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인의 수고와 고단함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노고에 대한 마땅한 보상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세미나에서 내 강의를 듣고 나니 모든 사람이 다 자신과 같은 마음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자신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과 다르게 평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며 울먹였다. 그리고 부인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그 환자의 종양표지자 수치가 1700에서 1400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250에서 50이 되었다가 마침내 소수점 이하가 되었다. 암을 극복하고 건강을 되찾은 것이다.

말기암을 기적적으로 극복한 분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의 하나는 ‘깨달음’이다. 건강할 때는 모르고 있던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거나, 가까운 사람의 숨은 마음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그래서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면 중심을 잃고 흔들리던 자율신경도 중용을 유지하게 된다. 덩달아 식생활이 안정되어 몸의 자연치유력이 높아지니 암이 물러갈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에서 만들어진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는 사회를 위해서는 꼭 필요하겠지만 내 몸과 마음이 다칠 정도로 그것에 얽매이는 것은 어리석다. 대사증후군이 염려되어 살이나 좀 빼볼까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설명으로 들리겠지만, 좋다는 것을 무조건 좋게 판단하는 것도 일종의 이분법적 사고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물을 자주 마시는 게 건강에 좋다고 해서 매일 몇 리터나 되는 물을 마시면 몸이 찬 사람에게는 나쁜 영향이 나타난다. 물론 몸이 따뜻한 사람도 과유불급의 진리를 지켜야 한다.

내게 맞지 않는 것은 내 몸이 알아서 겉으로 드러내준다. 단계적 칼로리 감량을 할 때도 그 효과를 오감으로 확인하면서 양과 질을 조절하면 된다. 몸이 내는 소리를 잘 들으려면 마음이 소란스럽지 않아야 한다. 윤리도 도덕도 상식도 다 좋지만 자연의 섭리를 생각해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도 중용을 지키도록 한다.

출처 : <건강하지 않을 수록 더 적게 먹어라>

저자 : 시바타 도시히코

1944년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도쿄농업대학에서 동물생태학을 전공했다. 대학생 시절에는 체중 100㎏이 넘는 거구였다. 20여 년간 매크로비오틱과 현미채식 등을 실천하다가 건강식 전문가가 되어 지금은 사람들에게 매크로비오틱과 현미채식을 지도하고 있다.
그러나 매크로비오틱과 현미채식으로도 체중이 만족할 만큼 줄어들지 않자 하루 섭취열량을 극단적으로 줄여나가는 ‘단계적 칼로리 감량’에 도전, 1년 만에 57kg까지 체중을 줄였다.
2007년 5월 30일부터 2008년 5월 29일까지 1년에 걸쳐 실행한 단계적 칼로리 감량은 1500kcal에서 시작해 400kcal까지 하루 섭취열량을 줄여나가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 시작했는데, 점차 대사증후군과 생활습관병을 비롯한 온갖 건강문제들이 해결되고 오감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면서 칼로리 감량의 효과를 체감하게 되었다. 2013년 6월 현재, 그는 하루에 400kcal를 먹고도 건강히 잘살고 있다.
『건강하지 않을수록 더 적게 먹어라』는 적게 먹고도 얼마든지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1년간의 체험을 통해 초저칼로리 식생활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지를 알리는 것은 물론이고 1년간의 칼로리 감량 과정에서 겪은 호전반응, 신체 및 체중의 변화, 건강검진 결과, 칼로리 감량을 할 때 주의할 점, 칼로리별 식단과 레시피 등을 실음으로써 독자들이 칼로리 감량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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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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